고독한 독서가

당신들의 근면은 도피다 <당신은 지루함이 필요하다, 마크 호킨스>

구새주 2022. 4. 5.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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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루함이 필요하다
우리는 왜 주말을 기다리며 일주일을 숨 가쁘게 보낼까? 왜 퇴근 후에 맥주를 마시거나 TV를 보면서 시간을 때우는가? 막상 기다리던 주말이 됐을 때 아무런 약속이 없으면 왜 허전하고 불안할까? 정답은 지루함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지루함을 느낀다. 이런 지루함을 채워 넣기 위해 쉴 새 없이 부산하게 움직이거나 의미 없는 활동에 열중하는 척 스스로를 속인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도, 우리의 본능과 지루함을 터부시하는 사회의 압박이 지루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도록 항상 무엇인가를 하려고 한다. 이런 과정에서 지루함을 때우기 위해 하는 행동들 때문에 중독이 일어나거나 스스로를 파괴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언뜻 보면 지루함 때문에 우리의 몸과 정신이 파괴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다르다. 지루함 때문이 아니라 지루함을 회피하려고 하는 행동이 파괴를 낳는다. 지루함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인간은 지루함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지루함을 느끼는 순간, 지루함을 회피하기 위해 TV라도 보면서 ‘시간을 죽이’거나 술을 마시거나, 친구를 만나기 위해 약속을 잡으려고 한다. 이런 과정이 계속 이어지면, 정작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을 갖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지루함을 느낄 때 지루한 시간을 자신을 돌아보고 인생의 의미를 찾는 시간으로 바꾸는 것이다. 지루함의 힘 인간은 24시간 항상 무엇인가에 몰입할 수 없다. 하지만 끊임없이 일하고 새로운 무엇인가를 찾을 때 번아웃 현상이 온다. 지루함은 우리에게 잠시 쉬고 인생의 큰 그림을 바라볼 시간과 공간을 안겨 준다. 창조건 소비건 잠시 끊고 쉬어야 다시 시작했을 때 즐겁다. 인생에 있어서 한계효용체감을 느낀다면 더욱 지루함의 시간이 필요하다. 지루함이 우리에게 가장 큰 즐거움의 공간으로 바뀔 때는 창의성을 발휘할 때다. 저자는 지루함과 창의성의 관계를 ‘끈끈한 관계’로 표현한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일에 전적으로 집중하고 몰입하지만, 몰입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무엇인가를 해결하기 위해 몰입하면 시야가 좁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루함의 공간에서는 정반대다. 우리의 정신은 지루함이 달갑지 않다. 지루함을 느낄 때 우리의 정신은 모든 힘과 창의성을 합쳐 다시 무엇인가에 몰입하려고 한다. 이때가 위대한 발상과 창의성의 돌파구가 되는 순간이다. 우리는 지루함에 공간을 내줄 시간이 필요하다. 지루함을 곧바로 채우기 위해 TV나 게임에 지루함이 차지할 공간을 내어주게 되면, 창의적인 발상이 끼어들 틈이 사라진다. 대화를 하는데 자기 혼자서만 계속해서 말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이 끼어들 틈이 없다. 당신이 조용해졌을 때 다른 이들이 침묵의 공간을 채울 수 있다. 우리는 지루함이라는 섬을 통해 우리의 삶이라는 큰 그림을 조감할 기회를 얻게 된다.
저자
박찬국 (해제), 마크 A 호킨스
출판
틈새책방
출판일
2018.01.02

 
 
우리는 시간을 활용해 끊임없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며 산다. 또, 화수분 같은 행복을 안겨줄 최종 상태나 목적지가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우리가 일을 하는 목적은, 돈을 벌어 이를 일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는 여가 활동에 쓰는 순환 과정을 이어가기 위해서다. 자신의 일이 의미 있다고 자위하면서도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극단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이율배반적이다. 
 
 


 
 
지루함을 회피하면, 인생의 만족을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우리는 남는 시간에 먹고, 마시고, 약물에 취하고, 아무것도 안 하느니 이야기가 이어지는 드라마라도 보겠다고 tv를 킨다. 가짜 만족을 주는 활동으로 인해 늘 주의가 흐트러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삶을 진정성 있게 들여다보지 않는다. 인생을 고찰하지 않을 때, 우리는 일차원적인 삶이 적절한지 따져볼 것도 없이 수동적으로 살아간다.

텅 빈 실존적 지루함이란, 실존적으로 지루하면서도 할 게 아무것도 없을 때다. 우리는 자유 시간에 이런 지루함을 경험한다. 나치 강제 수용소 생존자인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 박사는 이런 종류의 지루함이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보인다고 말한다. 그는 ‘일요일 노이로제’를 예로 들었다. 생활 속 바쁜 일들에 정신이 팔리지 않으면 뭔가 빠뜨린 것 같은 불편한 감정이다. 이런 감정은 곧 ‘시간 죽이기’로 이어진다. 일주일 내내 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얻어낸 ‘텅 빈’ 시간이 오히려 너무 괴로운 시간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다시 한 주가 시작되기를 바라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면 뭔가 빠진 것 같다는 꺼림칙한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지루함은 어째서 무서운가

 

19세기 프랑스 작가 마리 조세핀 드 수앵은 지루함이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했다. 지루함에 빠지면 사회적 규범과 문화적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한 자신이 발가벗겨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생에 걸쳐 세계관을 흡수한다. 세계관에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 어떤 인생을 살아야 최선인지, 무엇을 갈구해야 하는지, 누가 좋은 사람인지 판단하는 신념들이 존재한다. 여전히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생각의 노예이다. 사람은 역시 외향적이어야 하니까 친구는 많아야 하고, 최신 전자 제품을 소유해야 되고, 엄청나게 성공해야 하는 데다가, 그 과정을 고통스러워하기는커녕 무한한 즐거움을 느껴야만 한다. 그런데 지루함의 순간은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심는다. 그러나 잘못된 건 지루함이 아니다. 지루함의 공간에 피어난 그런 신념이다.

사람들은 어쩌면 ‘존재의 완성’을 찾아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생에서 제대로 된 목표만 찾아낸다면, 완벽하고도 온전한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삶에 영원히 충실할 수 있도록 나를 이끌어 줄 인생 목표를 갈구한다. 그러나 지루해지는 바로 그 순간, 시간 속 공허한 공간을 인생의 어떤 의미로도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곳에는 그저 지루함만 있다. 목적도, 의미도, 아무것도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의미
 


현대 사회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라르스 스벤젠은 인생이 존재를 위한 분투이고, 존재가 보장됐을 때 삶은 지루해진다고 했다. 다시 말해, 기본 욕구가 충족되면 삶은 지루해진다고 했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이렇게 생존을 넘어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욕구를 일컫어 ‘의미에의 의지’로 명명했다. 카를 융은 개인의 의미 부재가 정신 건강을 병들게 하는 큰 이유라고 했다.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 어반 얄롬도 인생의 의미가 없을수록 정신 문제를 더 많이 겪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인생의 길잡이가 될 개인의 의미를 구축하는 일은 인간 존재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 중 하나다.

 

 

 

지루함은 존재의 한계를 폭로하고, 완벽한 존재를 찾아 헤메는 일을 그만두라고 한다. 역설적으로 인간의 존재는 한계가 있고, 우주를 아우르는 의미는 없으며, 완벽한 형태의 존재도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가능성이 있다.

하이데거는 정체성에 매달려 있던 끈을 놓아 버릴 완벽한 공간이 바로 지루함이라고 말한다. 지루함에 아주 깊게 빠져들면, 내 정체성이 나 또는 내가 속한 문화가 자의적으로 부여한 의미로 이뤄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엄마, 아빠, 변호사, 또는 교사로 자리매김 할 것이다. 하지만 무인도에 홀로 표류하는 마지막 지구인이 되면, 이러한 정체성도 역시 사라진다. 그런 타이틀을 만들어낸 모든 관계와 비교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지루함은 정체성이 유동적인 개념이고, 당신이 특정한 방식의 존재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진리를 깨닫게 한다.

니체는 지루함을 일컬어 ‘삶 속의 죽음’이라고 불렀다. 흥미롭게도 이런 수준의 지루함에 몸을 맡기고 심연으로 가라앉으면, 깊은 지루함 속에서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가 오로지 존재에 대한 시각이 너무 편협했던 탓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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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지루함을 허하는 방법

 

오늘날은 잠들기 전까지 1분 1초도 쉬지 않고 쉽게 시선을 돌릴 것들이 넘쳐난다. 그런 까닭에 지루한 순간이 우리 생에 끼어들도록 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지루함의 공간에서 인지한 의미들은 해체가 가능하다. 가령 우리 중에는 지루함을 느끼면 누군가에게 당장 전화를 걸고 싶은 욕구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 이런 경우 지루함의 공간 안에서 떠오른 감정은 외로움일 것이다. 아마 이 감정은 의식적으로는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지루함의 공간 안에 남아 있어야지 인지할 수 있는 감정이다. 욕구가 생기자마자 전화기를 집어 들어 집중을 깼다면 몰랐을 것이다. 우리가 나고 자란 의미 체계의 쇠사슬을 끊어주는 것이 바로 지루함이다.

궁극적 의미란 없다는 이 깨달음은 현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윤리적 토대다. 한쪽만 진리라는 믿음 때문에 일어난 신념의 전쟁이 얼마나 많았던가? 우리가 정치적으로 반대 입장에 있는 이들을 경멸하는 이유는 그들의 신념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의 가치관을 위협해서일까? 반대 세력은 태생적으로 틀려야만 한다. 반면에 지루함의 공간에 익숙해지면 우리 의미 체계가 갖는 자의적인 성격을 감지하고, 자신의 행동에 의미 있는 윤리적 토대를 확립할 수 있다.
 
 


 

오늘날의 세계는 삶에서 시선을 돌리기가 정말 쉽다. 우리는 인생이 온갖 바쁨과 오락을 준다고 생각한다. 최대한 많은 것으로 하루를 채워야 의미 있고 충만한 인생을 산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을 무엇으로 채워야 하고, 어째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짬을 내 고민하지 않는다. 주어진 삶의 형태를 기본 틀로 받아들인다. 바야흐로 ‘맥미닝 McMeaning: 찍어낸 의미’의 시대이다. 그러니 삶에서 충만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 것도 당연하다.

어떤 예술가도 이상 속의 작품을 완벽히 구현해낼 수 없듯, 우리는 완벽한 행복이나 이상적인 자아, 또는 퇴색하지 않는 완벽한 의미를 찾는 게 가능하다는 기대를 접을 수 있다. 하지만 이 한계를 인식함으로써 인생에 열정이 피어난다.  인생의 부조리나 지루함을 없애기란 불가능하다. 이 두가지는 언제나 함께 존재한다.

우리 사회는 산만함이 임계점에 도달했다. 의미를 애타게 갈구하지만,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오락과 몰입에 중독된 나머지, 인생을 의미 있게 느끼기 위해서 더 많은 갈등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이제 더는 삶에서 눈을 돌리지 말고, 진정한 삶을 시작해보자.
 
 
 
 



고된 노동을 사랑하고 빠른 것, 새로운 것, 진기한 것을 추구하고 있는 당신들이여, 당신들은 모두 인내력이 부족한 자들이다. 당신들의 근면은 도피다. 자기를 망각하려고 하는 의지다, 니체





 

이렇게 읽었답니다

 
 
 

 

🖋 짧은 후기

 
바쁠 때 행복하고, 여유가 생기면 불안했습니다. 오히려  시험을 준비할  때 충만하고 시험이 끝나면 공허했고요. 전자들이 너무 소중했다기보다는, 그냥 정신이 없게 만드는 수단임을 알긴 알았지요.  그렇게라도 해서 허무함에서 달아나고 싶었습니다. 지금도 뭐 크게 나아진 게 있나 싶지만...
 
저는 불완전해서 계속 책을 읽는 거 같습니다.  대견하게 보는 사람도 있고,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는데 사실 그냥 살아남기 위한 방식 중에 하나입니다. 제가 선택한 제 생존 방식 중 하나인 셈이죠. 이 없이 괜찮은 삶을 살 수 있다면 굳이 뭐 읽을 필요 있나요. 책에 대한 강박은 없었으면 합니다.
 
아무튼, 쉬는 걸 갈망해서 마침내 쉬었는데 편안해지기는 커녕 이상한 기분을 느껴보신 분이 적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괴리감에서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자에게서 달아난 존재'를 볼 수 있었습니다.... 멋있게 말했는데요, 한마디로 아주 별로였습니다. 
 
좋아하는 작가인 박찬국 교수가 해제를 써 이 책을 알게 되었고, 읽기 시작했는데 꽤 좋았습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지루한 시간 갖기'를 일종의 마음 챙김 명상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네요. (책에도 언급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런 판단 없이 자신을 마주하는 것이란 왜 이리 어려울까요. 필요한 것을 아는데도, 자율주행으로 핸드폰을 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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