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무라카미 하루키
- 출판
- 문학동네
- 출판일
- 2019.05.27
🏃♂️초 중하급 달리기 동호회 통신 2
고백하자면 나는 경사길이 많은 레이스를 좋아한다. 오래전 나라의 '아스카 마라톤'에 나갔는데 업다운이 많은 코스라 완전히 탈진했다. 그때 느낀 바가 있어 극복해볼 요량으로 그 뒤로 연습 때 일부러 경사길을, 그것도 되도록 힘든 오르막길을 골라 달렸다. 그러다 보니 신기하게도 경사길이 좋아져서, 레이스에서도 오르막길이 나타나면 '좋았어, 오르막이다' 하고 절로 웃음이 나오게 되었다. 보통은 피로를 느끼기 시작할 무렵 오르막이 나타나면 맥이 빠지는데 내 경우는 완전히 반대다. 이 차이에서 오는 정신적인 요인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나의 경사길 달리기 기본 방침은 '내리막에서 다섯 명 앞지르고 오르막에서 열 명 앞지른다'로, 내리막에서는 의식적으로 페이스를 떨어뜨리고 오르막에서는 기어를 내리고 액셀을 꾹 밝는다. 이런 방식이 적성에 맞는지, 페이스만 잘 지키면 끝까지 다리에 부담이 오지 않는다.
달리기뿐 아니라 일할 때도 너무 술술 풀리면 오히려 기분이 뒤숭숭해진다. 굼실굼실 간지러운 기분이다. 누가 칭찬해주기라도 하면 온몸이 긴장해서 시시한 말이 입에서 튀어나가고 결국 자기혐오에 빠진다. 그런데 맞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갑자기 생생해지는 것이다. '좋았어, 이제 오르막길이다' 싶으면 얼굴이 흐물흐물 풀어져서 기어를 서서히 낮춘다. 내가 생각해도 괴상한 성격이다. 장거리 달리기, 더욱이 오르막길이 좋다니. 그래도 성격이란 아마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지 싶네요.
🖌️ ’얼굴이 흐물흐물 풀어져서 기어를 서서히 낮춘다’ 는 표현이 좋다. 말랑해질 얼굴이 저절로 연상되면서 피식 웃음이 난다.
아무리 그래도 오르막길은 상상만 해도 귀찮다. 마라톤을 잘 해보고자 노력하는 모습, 멋지긴 한데 나라면 어땠을까? 마라톤 따위 힘들어서 싫다!고 쉽게 포기했을지 모른다. 세상에 완벽하게 사랑스러운 것은 없는데. 가볍게 부는 맞바람에도 쉽게 실패감을 느끼고 도망치지는 않았었나 뒤돌아보게 된다.
🙃하루 만에 확 바뀌는 일도 있다
결론부터 말해 데키리코의 그림은 예상과 달리 재미있었다. 그가 얼마나 맹렬한 노력을 거듭해 자기 스타일을 확립하고, 성공하고, 그 뒤로도 새로움을 기구하는 한편 나름의 시행착오 끝에 죽어갔는지 - 그 발자취의 성실하고 절실한 기록이었다. 세간의 일반적인 평가대로 ‘데키리코야 뭐…’라고 가볍게 생각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내가 지금까지 본 것은 그가 남긴 방대한 작품 가운데 극히 일부, 그나마도 복제품에 지나지 않았다.
미술관을 나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 뒤로 나는 데키리코의 팬이 되었다. 그때 느낀, ‘뭔가가 확 바뀔’ 때 근육이 뒤틀리는 것 같은 감각이 지금도 몸에 남아있다. 사랑만큼 다이내믹하지는 않지만, 이런 하루가 있으면 좀 이득을 본 기분이 된다.
전에도 어디에 쓴 이야기인데, 내가 불현듯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어느 하루’가 있었다. 스물아홉 살 4월의 오후였다. 나는 그때를 선명하게 기억한다. 햇빛과 바람의 강약, 주위에서 무슨 소리가 어떻게 들렸는지도 어제 일처럼 떠올릴 수도 있다. 내 머릿속에서 문득 무언가가 작게 반짝였고, 그래서 ‘그래, 지금부터 소설을 써야지’하고 생각했다. 아니, ‘나는 소설을 쓸 수 있다’고 인식했다. 구체적인 계기나 근거 같은 건 전혀 없다. 그저 혼자서 인식했을 뿐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실은 그것도 격렬한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은 원리였는지도 모른다. 찌릿찌릿 등줄기가 훑는 느낌은 격렬한 숙명의 사랑 외의 그 무엇도 아니었다. 음, 꽤 좋은 거였다.
🖌️ '격렬한'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것도 개인차가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의심이 많기 때문에 주로 스며드는 쪽이다. 하루 만에 확 바뀌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한달까. 그렇다고 해서 공감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스며드는 것도 결국 비슷하다. 처음엔 미약하여 눈치채기 어렵지만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확실히 뭔가가 바뀌었다고 인식하게 되니까.
중요한 결정은 과거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과거에 기반한다면 합리적일 수는 있지만 변할 수는 없다. 결국 내 마음이 그래, 하는 ‘구체적인 계기나 근거 같은 건 없는’ 태도가 되어버려도 가끔은 비합리적인 결정이 새롭고 찬란하다.
🎼음악의 효용
한 이십 년 전 일인데, 시부야 NHK 홀에 스비아토슬라프 리피터의 피아노 연주회를 들으러 갔다. 아직 소설가가 되기 전의 일이다. 그날은 나도 아내도 너무 피곤해서 도저히 음악 감상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도 비싼 티켓을 그냥 버릴 수 없었기에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공연장에 갔다. 마지막으로 브람스의 피아노협주곡 2번이 연주되었다.
조용한 호른 소리 인트러덕션에 이어 피아노가 들어온다. 그걸 듣는 사이 이상하게 피로가 몸밖으로 스르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지금 치유되고 있다’는 뚜렷한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거의 꿈꾸는 기분으로 음악을 들었다. 세포 구석구석 눌어붙었던 피로가 한 겹씩 떨어져 나가 사라졌다. 곡이 끝난 뒤에는 거의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 얼마나 멋진 체험이란. 나는 생각했다.
그 후에도 몇 번 같이 리히터의 공연장에 갔다. 네다섯번은 갔지 싶다. 하나같이 훌륭한 연주였다. 그러나 ‘치유됐다’고 느낀 것은 이상하게도 처음 한 번뿐이었다. 과연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이것도 소설가가 되기 전 일인데, 그날 밤도 일 때문에 지칠 대로 지쳐 말할 수 없이 졸렸다. - 원, 인생에는 정말이지 피곤한 일이 많죠. 홀에 도착해 앉자마자 쌔근쌔근 잠들어버렸다.
그런데 한 알토색소폰 솔로가 시작되자마자 눈이 번쩍 뜨였다. ‘이게 뭐지?’ 싶었다. 무대를 보니 소니 스팃이 솔로 연주를 하고 있었다. 나를 두드려 깨운 것인 소니 스팃의 솔로였던 것이다. 나는 잠이고 뭐고 확 달아나 탐욕스럽게 연주를 들었다. 그의 솔로가 끝나고 베니 골슨의 솔로가 시작됐다. 그러자 졸음이 다시 쏟아져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그날 밤은 여럿의 솔로 연주가 있었지만 스팃의 솔로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당연하다. 스팃의 솔로 말고는 푹 잤으니까. 스팃이 연주할 때마다 눈이 번쩍 뜨였다가 연주가 끝나면 다시 감겼다. 공연이 끝났을 때는 피로가 싹 풀리고 몸이 가뿐했다. 더는 졸리지 않았다. 나는 다시 태어난 사람처럼 생기발랄했다.
음악은 때로 보이지 않는 화살처럼 똑바로 날아와 우리 마음에 꽂힌다. 그리고 몸의 조성을 완전히 바꿔버린다. 그런 때면 마치 열일곱살로 돌라가 다시 한번 격렬한 사랑에 빠진 기분이다. 그렇게 근사한 체험은 자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실제로는 몇 년에 한 번 밖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도 그런 기적 같은 해후를 찾아, 우리는 공연장과 재즈 클럽에 드나든다. 실망하고 돌아오는 날이 더 많다 하더라도.
My comment
하루키의 글이 딱 이렇다. 이 사람은 대부분의 글을 시덥잖은 이야기로 가득 채운다. 이를테면 공중 부양이라던지, 뭐 모텔 이름에 대한 고뇌라던지... 흐음 그런가, 하며 글을 넘기다가도 킬킬거리게 만드는 이야기, 생명력 있는 표현들을 만나면 금세 즐거워진다. 여러 번 읽어도 울렁이는 글귀들, 반짝거리는 생각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책장을 넘긴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쯤은 있었다. 이것이 내가 하루키의 에세이를 놓칠 수 없는 이유다.
21년 7월에 읽고, 22년 12월에 남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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