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독서가

소소한 일 하나하나의 무한한 집적이, 나라는 인간을 이런 형태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 책 <고양이를 버리다, 무라카미 하루키>

구새주 2021. 1. 5.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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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버리다
그간 일본 문학 특유의 사소설풍 서사와는 다소 거리를 두어온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장 사적인 테마 즉 아버지에 대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제목 그대로 아버지와 바닷가에 고양이를 버리러 간 회상으로 시작하는 『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유년기의 입양과 파양, 청년기의 중일전쟁 참전, 중장년기의 교직 생활, 노년기의 투병 등 아버지 ‘무라카미 지아키’ 개인의 역사를 되짚는 논픽션이다. 이를 통해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존재론적 근간을 성찰하고 작가로서의 문학적 근간을 직시한다. 작가는 시종 아무리 잊고 싶은 역사라도 반드시 사실 그대로 기억하고 계승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그리고 자랑스럽지만은 않은 아버지의 역사를 논픽션이라는 이야기의 형태로 용기내어 전한다. 글 쓰는 사람의 책무로서. 이 책을 읽으면 《태엽 감는 새 연대기》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질 것이다. 첫머리에 등장하여 일 년 가까이 행방불명되었다가 다시 돌아온 고양이 와타야 노보루는 물론, 산 사람 가죽 벗기기 등 소설 속 잔인한 풍경들이 작가의 삶의 조각에서 비롯되었음을 눈치챌 수 있다. 《중국행 슬로보트》라는 작품의 출발점도 《후와후와》의 보드라운 회상이나 《기사단장 죽이기》 속 난징전 에피소드도 마찬가지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들은 물론, 직간접적으로 식민지의 아픈 역사를 경험한 한국인이라면 더더욱 누구에게나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일 것이다.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출판
비채
출판일
2020.10.16

 



[작가 후기] '역사의 작은 한 조각'

 

내가 이 글에서 쓰고 싶었던 단 한 가지는, 전쟁이 한 인간 - 아주 평범한 이름도 없는 한 시민이다- 의 삶과 정신을 얼마나 크고 깊게 바꿔놓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내가 이렇게 여기에 있다. 아버지의 운명이 아주 조금이라도 다른 경로를 밟았다면, 나라는 인간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 무수한 가설 중에서 생겨난 단 하나의 냉엄한 현실.

역사는 과거의 것이 아니다. 역사는 의식의 안쪽에서 또는 무의식의 안쪽에서, 온기를 지니고 살아있는 피가 되어 흐르다 다음 세대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 쓰은 것은 개인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가 사는 세대 전체를 구성하는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 말을 '메시지'로 쓰고 싶지는 않았다. 역사의 한 모퉁이에서 있는 이름 없는 한 이야기로서, 가능한 한 원래 형태 그대로를 제시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과거 내 옆에 있었던 몇 마리 고양이들이 그 이야기의 흐름을 뒤에서 조용히 떠받쳐주었다.





아버지가 딱 한 번 당신 속을 내게 털어놓듯이, 자신이 속한 부대가 포로로 잡은 중국 병사를 처형한 일이 있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중략) 어쨌거나 아버지의 그 회상은, 군도로 인간을 내려치는 잔인한 광경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내 어린 마음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하나의 정경으로, 더 나아가 하나의 의사체험으로, 달리 말하면, 아버지의 마음을 오래 짓누르고 있었던 것을 - 현대 용어로 말하면 트라우마를- 아들인 내가 부분적으로 '계승' 한 셈이 되리라.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고, 또 역사라는 것도 그렇다. 아무리 불쾌하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라 해도,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할 수 없었다. 차분히 공부에 집중하려는 마음이 도무지 생기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아버지는 내게 만성적인 불만을 품게 되었고, 나는 만성적인 고통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지금에 이르러서도, 아버지를 줄곧 실망시켰다. 기대를 저버렸다 하는 기분을 - 또는 그 잔재 같은 것을 - 품고 있다. 어느 정도 나이를 넘어서부터는 '사람은 각자 개성이란 게 있으니까, 뭐' 하고 떨어 버릴 수 있게 되었지만, 십대의 내게는 어느 모로나 그다지 마음 편한 환경이랄 수 없었다. 거기에는 언제나 막연한 가책이 따라다녔다. 지금도 때로 학교에서 시험 치는 꿈을 꾼다. 나는 단 한 문제도 풀지 못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간만 째깍째깍 흘러간다.

당시의 나는, 책상에 들러붙어 주어진 과제를 하고 시험에서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성적을 받는 것보다, 좋아하는 책을 많이 읽고, 좋아하는 음악을 실컷 듣고, 밖에 나가 운동을 하고, 친구들과 마작을 하거나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이 옳았다고, 지금은 확신을 가지고 단언할 수 있지만.

아마도 우리는 모두, 각자 세대의 공기를 숨 쉬며 그 고유한 중력을 짊어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틀의 경향 안에서 성장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와 아버지는 성장한 시대도 다르고, 사고방식도 다르고, 세계를 보는 시각도 다르다. 당연한 일이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관계의 재편성을 시도했다면 상황은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접점을 찾기 위해 시간과 품을 들이기 보다는, 아무튼 눈 앞에 있는 내가 하고 싶은 일에 힘과 의식을 집중하고 싶었다. 복잡하고 거추장스러운 혈연의 굴레보다는 그쪽이 내게는 한층 중요한 사항이었다.



우리는 그 여름날, 같이 자전거를 타고 줄무늬 암고양이를 버리러 고로엔 해변에 갔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그 고양이에게 추월당했다. 뭐가 어찌 되었든, 우리는 멋지고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체험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 해안의 파도 소리를, 소나무 방풍림을 스쳐 가는 바람의 향기를, 나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해낼 수 있다. 그런 소소한 일 하나하나의 무한한 집적이, 나라는 인간을 이런 형태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것은 내 어린 시절의, 고양이에 얽힌 또 하나의 인상적인 추억이다. 그리고 그 추억은 아직 어린 내게 생생한 교훈을 남겨주었다. '내려가기는 올라가기보다 훨씬 어렵다' 하는 것이다. 보다 일반화하면 이렇게 된다 - 결과는 원인을 꿀꺽 삼켜 무력화한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는 고양이를 죽이고 어떤 경우에는 사람도 죽인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고유하기는 하지만, 교환 가능한 방울이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나름의 생각이 있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 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되리라. 가령 그 한 방울이 어딘가에 흔적도 없이 빨려 들어가, 개체로서의 윤곽을 잃고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 사라져 간다 해도, 아니,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가기 때문에 더욱이.






📚 짧은 후기

에세이를 소설같이 쓰는 하루키의 맛을 느끼며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의 한 방울로서의 나, 주관적인 자의식으로 똘똘 뭉친 나 그 사이에서.
그리고, 엄청 얇다. 내용은 소장하고 싶지만 가격 대비 너무 비싸니 빌려서 보시길. (4/5)




[독서노트] 하루키를 좋아하세요? - 책 <아무튼, 하루키 / 이지수>

 

[독서노트] 하루키를 좋아하세요? - 책 <아무튼, 하루키 / 이지수>

나는 하루키를 좋아한다. 정확하게는 하루키의 에세이를 좋아한다. 애초에 소설을 많이 읽지도 않았거니와 성적 대상화가 많은 건 딱 질색이었기 때문에 그쪽으로 유명한 하루키의 소설을 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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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무라카미 하루키
기록일: 20.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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