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은 맥락을 고려하여 발췌하였으나 임의로 순서가 바뀌어있거나, 중략된 부분이 있음을 밝힙니다.
[여자다움]
“여자가 있으면 분위기가 좋아져, 지사님이 부드러워져.”
남성 중심의 조직 문화가 강한 정치권에서 여성을 대상화하여 품평하는 일은 너무도 흔했다.
여성 수행비서는 처음부터 하나의 물건이었다.
대상화된 객체였다.
[24시간 수행비서의 생활]
지사의 전화는 수행비서에게 모두 착신되어 있다. 그는 전화를 모두 돌려놓았고 개인적으로 통화하고 싶을 때만 직접 착신 전환을 풀어서 자신의 전화기를 사용했다. 한밤중에 오는 전화와 문자도 모두 수행비서가 받는다. 24시간 근무를 하는 것과 같았다.
안희정 부부의 보험 약관부터 담보 대출금, 중도 해지 비용 등도 내가 처리해야 하는 일이었다. 당사자의 통화나 방문이 필요한 일들을 대신 처리하느라 보험회사 직원에게 극구 사정하기도 했다. 그 외 심부름은 셀 수가 없다.
정치인 안희정의 대외적 이미지와 내가 업무를 통해 겪는 실상은 낱낱이 상반되었다.
그는 신분과 계급이 존재하는 세계에 살았다.
나의 자리에서는 그에게 아주 기본적인 인권이나 노동권도 존중받기를 기대할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움과 무기력에 젖어들었다. 고열이 잦아졌고 해외 출장기로 가는 비행기에서는 계속 구토를 하기도 했다. 첫 번째 성폭력을 당한 것은 그렇게 내내 토를 하며 도착한 낯선 러시아에서였다.
[일상적 폭력과 다음 범죄를 위한 사과]
안희정은 성폭행을 한 후 매번 즉각 사과했다. 거듭되는 사과와 강도 높은 업무들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안희정은 내가 정신적으로 흐트러지는 모습이 잠깐이라도 보이면 괜찮아 보일 때까지 내내 미안하다고 했다. 그렇게 부하 직원을 성폭행하고도 맹목적인 복종을 하게 만들고, 입을 막아버렸다.
그의 성추행과 성희롱은 점점 더 과감해지고 심해졌다. 처음에는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지만 어느 시점을 지나자 무감각해졌다. 이 조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참고 일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했다.
오늘 하루만 버틸 수 있다면, 지난 여름의 성폭력을 잊을수만 있다면, 이 정도의 추행과 희롱은 아무것도 아니야, 일로 이겨내자, 그렇게 읖조리며 무기력해졌다. 시간이 흐르고 안희정의 힘을 알수록 더 이상 대항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아갔다.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왜 네 번이나 당해?”
나는 이것을 안희정에게 묻고 싶다.
그가 미투를 언급하며 네 번째 범행을 내게 가할 때, 나는 이것이 마지막이 아닌 또 다른 처음일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사과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어느 때보다도 선명히 깨닫게 되었다.
진정한 사과가 아니었다.
다음 범죄를 위한 수단이었다.
그저 나를 범행에 이용하고 묶어두기 위한 목줄 같은 것이었다.
[모든 과정은 위력 그 자체였다]
미투 이후 모든 과정은 위력 그 자체였다.
나는 사실을 밝히면, 물론 어렵고 시간이 걸린다 해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내가 상대해야 할 가해자는 한 명이 아니었다.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권력 조직이었다.
관계가 곧 권력이 되는 한국 사회에서 안희정은 도지사직을 내려놓았지만,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안희정의 증인으로 나섰던 일부 사람들의 직급이 급상승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병상일기]
사람들이 모두 저 거짓 글들처럼 날 쳐다보는 것 같아서 견디기 힘들었다.
죽어야만 시선이 바뀔까? 그래야 나를 믿어줄까?
그들이 말하는 ‘가짜 미투’가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 한국 사회에서 누가 대체 성폭력을 당했다며 제 인생을 그렇게 해체하면서까지 강간 경험을 내놓을까?
내가 살아 있는데도 저렇게 새빨갛게 거짓말을 하는데, 내가 죽는다면 더한 거짓말로 모든 게 새롭게 날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공범이다.
[꼭 얼굴을 드러냈어야 했어요?]
꼭 이름에, 얼굴까지 드러내놓고 이야기해야만 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미투 이후 나의 일상은 산산조각 났고, 파괴었다. 지금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가해자에게 법적 처벌을 가할 수 있는 방식을 선택한 뒤 제일 두려웠던 것은, 문제 제기를 한 후 내가 조용히 묻히고 사건도 사라지는 것이었다.
내가 사라지고, 가해자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또 다른 피해자가 계속 양산되는 결과가 가장 두려웠다. 안희정은 법원을 포함한 정보기관, 수사 기관 등 다양한 분야에서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안희정은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였다. 그런 세상이 있다는 걸 보아왔기에 나를 드러내지 않고 수사 기관에 수사를 요청한다면, 이 사건이 덮이거나 내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거대 권력 앞에서는 나를 드러내는 것이 나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설령 얼굴을 가리고 미투를 했더라도 나의 모습이 온 세상에 드러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유명 정치인의 수행비서의 얼굴을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다. 나는 숨겨질 수 없었다. 블라인드 뒤에서 미투를 한다면 온갖 억측이 사건을 가리고 수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성폭력 사건 본질 그대로, 진실 그래도 알려지기를 원했다.
[다시 세상에 나갈 수 있을까]
활동가의 제안으로 성폭력전문상담원 교육을 듣기로 결심했다.
여러 가지를 배우면서 내가 겪은 일이 나만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알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이 권력과 관계에 의해 유린당하고 고통받아왔다.
김복동 할머니부터 권인숙 선생님, 이외에 수많은 사람이 그 고통을 겪고 당당히 세상에 대항해왔다. 그분들이 처음 말하기 당시에 얼마나 많은 고통과 차가운 시선을 받으셨는지, 그 시선이 어떤 투쟁을 통해 변해왔는지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신 김복동 할머니가 전시 성폭력 생존자들을 위해 연대하신 삶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깊은 울림을 받았다.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웅크리고 있던 내게 수많은 나비가 날아와 날갯짓해주는 느낌이었다.
미투: 권력을 향한 고발
미투(Me Too)운동은 자신이 당한 성범죄 피해 사실을 알리는 캠페인으로, 17년 10월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소셜 미디어와 해시태그를달아 수많은 개인이 피해 사실을 고발하면서 대중화되었으며 한국에서는 18년 1월 29일 서지현 검사의 폭로를 기점으로 활성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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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입니다 -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플랫]
● “수행비서에 대한 성폭력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유죄가 확정됐다.지난해 3월5일...
m.khan.co.kr
- 저자
- 김지은
- 출판
- 봄알람
- 출판일
- 2020.03.05
정리일: 21.01
읽은날짜: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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