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부분은 버트런드 러셀의 책 <게으름에 대한 찬양> 中 ‘건축에 대한 몇 가지 생각’에서 발췌했으며 정리를 위하여 일부분은 생략되었음을 알립니다.
공장들과 열 지은 소규모 주택들은 그 둘 사이에 존재하는 현대 생활의 기묘한 불일치를 잘 보여준다. 생산은 점차로 대규모 집단이 되어가는 반면, 정치와 경제 영역을 벗어난 모든 것들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시각은 점점 더 개인주의적으로 돼가는 추세다.
이처럼 독립된 형태의 건축을 선호하게 된 것은 여성의 지위와 연관되어 있다. 여성 해방, 운동과 투표권 획득에도 불구하고 아내들의 지위는 적어도 임금 노동자 계층에는 과거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직업이 가정주부인 그녀는 자신이 가꿀 집 한 칸을 갖는 게 소원이다. 개인의 창의력을 발휘할 영역을 갖고 싶은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희망이겠지만 그녀에게는 집안일 외엔 다른 출구가 없다.
남편 쪽에는 아내가 자신만을 위해 일하면서 자신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해 있는 상태를 은근히 즐긴다. 게다가 아내와 집은 다른 어떤 것보다 그의 소유 본능을 충족시켜준다. 남편과 아내는 이따금씩 좀 더 사회적인 생활을 원하기도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로서의 소유욕 때문에 각자의 배우자에게 다른 남녀와 만날 위험스런 기회가 적은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모든 기혼 여성들이 집밖에서 일해서 생계비를 벌도록 규율로 정해 놓는다면 변화될 수 있다. 이런 여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식사까지 제공하는 숙소나 공동 부엌, 다시 말해 끼니 준비 걱정을 더는 것과 사무실에 나가있는 동안 아이들을 돌봐줄 보육원이다. 흔히, 기혼 여성이 밖에서 일해야 하는 경우 딱하게 여기는 게 관례다. 게다가 직장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별도의 직업이 없는 아내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까지 해야 한다면 대단히 과로하게 될 것이다.
건물 구조를 올바르게 바꾼다면 여성들은 집안 살림과 육아 일에서 상당히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중세 수도원에서와 같은 공동 편의시설을 확보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아이들의 필요에 부응하는 설비가 갖추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먼저, 단독 주택이든 집단 건물에 세들어 살든 노동 계급 가정의 가사가 독립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의 제도에서 파생되는 불필요한 손실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생각해보자.
어머니가 받는 해악은 대단히 심각하다. 여성은 보모, 요리사, 가정부의 일을 어느 것 하나 전문적으로 교육받기 못했으면서도 혼자 감당해야 한다. 따라서 일을 잘 수행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그녀는 언제나 지쳐있어서 아이들마저도 기쁨을 주는 존재라기보다 성가시게만 느껴진다. 남편은 일을 마치면 여가를 즐기지만 그녀에겐 여가라는 게 없다. 결국 그녀가 짜증 잘 내고, 속 좁고, 시기로 가득 찬 사람으로 변하는 건 시간문제다.
이 모든 문제들을 일거에 치유하려면 건축물에 공동체적 요소를 도입하기만 하면 된다. 독립된 작은 주택들과 집집마다 자기 부엌이 있는 공동 주택 단지들은 철거되어야 한다. 공동의 부엌과 널찍한 식당, 오락과 회합과 영화 감상을 위한 회관이 갖춰져야 한다. 중앙의 뜰에는 보육원을 세우는데, 아이들이 쉽게 다치지 않도록 부서지기 쉬운 물건이 없도록 건축한다.
여성들이 누리게 될 혜택은 대단히 크다. 우선 아이가 젖을 떼는 대로 육아를 전문적으로 교육받은 이들에게 하루 종일 맡기게 된다. 그들도 남편들처럼 일하는 시간과 여가 시간을 따로 갖게 될 것이다.
산업주의 경향은 애초부터 생산만 지나치게 강조하고 소비와 일상생활에는 별로 역점을 두지 않았다. 이것은 생산에 관계된 이윤을 강조한 결과다. 그리하여 공장에서는 과학화와 최대한의 노동 분업이 이루어지는 반면 가정은 여전히 비과학적인 채로 남겨져 다양하기 이를 데 없는 과중한 노동이 어머니에게 떠맡겨졌다. 인간 활동 가운데 가장 무계획적이고 비조직적이며 불만족스러운 영역은 금전상의 이익을 기대할 수 없는 부분들이라는 시각이 대두된 것은 이윤 창출이란 동기가 지배적인 데서 나온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나 내가 제안하는 건축상의 개혁에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보다도 임금 노동자들 스스로의 심리 상태에 있다. 사람들은 아무리 싸우고 살아도 ‘가정’이란 프라이버시를 좋아하며 그 안에서 자존심과 소유욕의 충족을 찾는다. 과거 수도원에서 볼 수 있었던 독신주의적 공동생활에서는 그런 문제가 야기되지 않았다. 결국 프라이버시 본능을 초래하는 것은 결혼과 가정이다.
현재 임금 노동자 계급의 여성 해방 운동은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 있지만 파시스트적 반동이 없는 한 꾸준히 발전해 나갈 것이다. 이것이 원동력이 되어 조만간 여성들이 공동 취사와 보육원을 선택하는 길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변화에 대한 바람은 절대로 남자들에게서 나올 수 없다. 설사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라 하더라도 남성 노동자들이 자기 아내들의 지위 변화의 필요성을 이해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 저자
- 버트런드 러셀
- 출판
- 사회평론
- 출판일
- 2005.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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