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독서가

행복하고 존엄한 삶은 내가 결정하는 삶이다 : <자기 결정, 페터 비에리>

구새주 2021. 3. 24.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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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고 존엄한 삶은 내가 결정하는 삶이다."

"타고난 것들은 결정할 수 없지만 어떻게 살아갈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자기 결정
『자기 결정』은 독일의 저명 철학자이자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작가 페터 비에리 교수의 신작으로, 전작 《삶의 격》에 이은 ‘삶과 존엄’ 3부작 중 두 번째 책이다. 《삶의 격》에서 페터 비에리가 삶에서 가장 절실한 가치로 ‘존엄성’을 이야기했다면, 이번에는 존엄성을 지키며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삶의 방식으로 ‘자기 결정’의 철학을 이야기한다. 저자에 따르면 자기 결정의 삶이란 외부의 시선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기준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방식을 의미한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른 사람들에게 부화뇌동하며 갖게 된 생각과 취향은 아닌지 들여다보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써나가는 ‘진정한 나’로 살아갈 때야 비로소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냉철한 자기 인식에서 비롯된 자기 결정의 삶은 곧 문화적 정체성을 가꾸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살아가면서 접하는 다양한 교양 중 어떤 것을 내면화할 것인지 스스로 결정함으로써 문화적 정체성을 구축해가는 것이다. 이런 삶이라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취향과 정체성을 가질 것인지, 어떤 신념에 따라 행동할 것인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페터 비에리
출판
은행나무
출판일
2015.09.21

 

 

자기 결정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스스로를 테마로 삼기]

자신의 의견과 바람과 느낌들에 관한 한 그저 맹목적으로 닥치는 대로 살아가거나 되는대로 맡겨서는 안 되고 우리 스스로를 테마로 삼아서 돌볼 수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의 특징입니다. 이것은 뒤로 한 발짝 물러나 자신의 경험과 내적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으로부터 자기 결정이 성공하는 경험을 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그 무엇이 탄생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아상입니다. 자아상이란 우리가 어떤 모습이고 싶은가에 대한 생각입니다. 우리의 삶이 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우리의 자아상과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을 때, 그리고 우리가 행위와 사고와 감정과 소망에 있어서 되고 싶어 하는 모습의 사람이 되었을 때, 그것을 자기결정적 삶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스스로를 알기]

자아상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이러한 종류의 자기 결정을 이루는 내적 구조 변경은 정신적 삶의 강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오른 고고한 곳으로부터 내려오는 어떤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나를 판단하는 위치는 이 강의 일부분이며 다시금 내 특정한 사고나 소망이나 감정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자아상의 기준이라는 것도 손댈 수 없는 신성한 것이 아닙니다.러한 자아상에 허리를 굽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구속하고 노예처럼 옭아매는 생각을 과감히 던져버리는 일이 오히려 더 중요할 때도 있지요. 

 

또, 내적 구조 변경은 어느 날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하여 영혼의 연금술로 뚝딱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위해서 환경을 바꾼다든가 새로운 경험을 해본다든가 낯선 인간관계를 개척한다든가 필요한 경우 치료나 훈련을 받는다던가 등등 외적인 우회로가 많이 필요하지요. 이 모든 것은 내적 단조로움과의 싸움, 체험과 바람이 변화 없이 굳어버리는 현상과의 투쟁입니다.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 인식에 있습니다. 원하는 나의 모습과 현재의 내가 너무 달라 계속해서 마음의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다면 자아상뿐만 아니라 자꾸만 고개를 쳐드는 그 욕구들의 근원지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이 나를 조종하는, 나의 느낌들과 내가 원하는 것들의 표면 밑에서 흐르고 있는 소용돌이를 감지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결정은 내가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과 굉장히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현실적인 자아상에 도달하여 그 자아상과 합일을 이루려 하는 사람은 의식되지 않은 삶의 이력을 꿰뚫어 보는 작업을 시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만 자기 인식에 걸림돌이 되는 내적 강박과 자기기만을 해결할 수 있지요. 자기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투명한 정신적 정체성을 형성해주고, 이를 통해서라면 말 그대로 삶의 작가와 삶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즉 자기 인식은 사치품이나 뜬구름 같은 철학적 이상이 아닌 자기 결정적 삶, 더 나아가 존엄성과 행복의 구체적 조건입니다.

 

 

[자신을 말로 표현하기]

그런데 스스로에게 묻는다는 것, 스스로를 이해한다는 것, 변화한다는 것, 이것들은 과연 정확하게 어떤 것을 의미하는 걸까요? 

 

이는 과 큰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경험하는 것들에 대한 정확한 말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자신에 관해 결정한다는 것, 이것은 자신의 생각에 관해 방향을 정하고 믿어왔던 것들을 다시 한 번 시험대에 올린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확실하다고 믿어오던 것에 대해 긍정과 부정의 증거를 찾아가는 동안 나는 그 확신들이 변화할 수 있는 내적 과정의 문을 열게 됩니다. 이 과정이 충분히 반복되면 내 의견의 총합이 완전히 탈바꿈하여 결과적으로 생각의 정체성이 변화하게 됩니다. 때문에 중요한 일을 맞닥뜨렸을 때 그것을 명백히 밝히는 과정이 자기 결정의 한 행위인 것이지요.

 

감정과 소망 같은 경우에도 같은 맥락을 발견할 수 있으나 그것은 사고보다 더욱 복잡하여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양상을 띱니다. 우리가 느끼고 바라는 많은 것들은 우선 우리 자신에게조차 혼란스럽고 불투명합니다. 상황과 그동안의 경험이 거쳐온 경로를 눈앞에 그려보는 해명과 명확화의 과정은 여기서도 그 대상을 가집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감정과 바람은 그 정체를 밝히고 표현하며 다른 감정이나 바람과 차별화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에서 전보다 확실히 더 명확하고 뚜렷한 윤곽선을 띠게 된다는 뜻입니다. 언어로 표현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혼란스러운 느낌들은 감정적 확신으로 변화합니다. 이것을 일반화해본다면, 경험을 나타내는 우리의 언어가 세분화될수록 경험 자체도 세분화된다고 할 수 있지요. 감정 교육이라는 표현이라는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감정을 스토아적 냉정함으로 무력화하려는 시도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주장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감정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과연 무엇인지 가르쳐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감정에 이리저리 튕겨나가는 고무공이 되지 않는 것, 그리고 감정이 가진 권력을 우리 안에서 휩쓸고 돌아다니는 이물질로 경험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을 이야기하기]

언어 능력이 없는 존재들에게도 기억이란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억들 간의 일종의 연관관계 같은 것을 생산해내지 못합니다. 이것은 언어로 서술되는 기억을 통해 가능한 것이지요. 

 

기억은 이야기될 때 이해 가능한 것이 되고 우리는 기억의 힘없는 희생양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습니다. 기억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도 없고 잊고 싶다고 해서 지울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이 런 의미에서 볼 때 기억하는 존재로서의 우리는 자기 결정적 존재가 아닙니다. 자기 결정적 존재가 되려면 일단 이해하는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생성되는 스토리가 있는 자아상은 미래에까지 쭉 이어져 쓰입니다. 그저 하루하루 보내면서 미래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한 계획을 가지고 만나게 되는 그 무엇으로 경험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누가 되고 싶은지에 대한 그림, 즉 우리 자신에게 설명하는 우리의 과거와 일치하는 그림이 필요합니다.

 

 

 

 

위 내용은 책  자기결정 中 1장 ' 자기 결정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에서 발췌하여 정리하였습니다.

 

 

 

 

 

My comment

 

읽은 날짜 : 21. 2월 ~ 3월 12일

별점: ★

닥치는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의도적인 삶- 자신을 마주하는 삶을 살고 싶게 함.

 

 

 

저자가 말한대로, (스스로/ 사회적으로 모두) 긍정적이라고 생각했던 개념을 하나 파헤쳐보려고 한다.

 

몰입은 늘 의미있는 것일까?

 

 '무언가에 집중하려는 노력'은 텅 빈 시간에 마주하게 되는 공허함을 피하기 위한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도피의 수단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왜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으로부터 도망치는가?

자신이 투명해지는 시간을 못견디는 것이다.

 

왜 투명해지는 게 두려운가?

의미의 부재, 성공에 대한 안달, 타인과의 비교...

자신을 재단하는 것으로 치닫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되돌아가면

그 순간이 바로 자기 인식을 하기에 아주 적합한 시간이다.

 

몰입한다는 것은- 무언가에 집중한다는 것은- 취미를 갖는다는 것은- 

물론 필요한 일이지만,

 

왜인지 답답한 혼자만의 시간을 견디기 위한 수단이라면

다시 재정비할 필요가 있는 개념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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