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독서가

아침의 피아노, 그리고 죽음 :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

구새주 2021. 5. 30.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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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영 선생님은 임종 3일 전 섬망이 오기 직전까지
병상에 앉아 메모장에 <아침의 피아노>의 글을 쓰셨다.
  
  
  2017년 7월 암 선고를 받았다.
그동안 이어지던 모든 일상의 삶들이 셔터를 내린 것처럼 중단되었다.

  

 





📌 이원을 회사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다가 길가에 차를 세운다. 담배를 피우며 아침 풍경을 바라본다. 전철역 앞 나의 주차 장소를 텅 비어 있다. 매일 나의 낡은 차가 서 있던 곳. 나를 일상으로 떠나보내고 늦은 밤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그 자리. 그 빈자리에서 마음이 또 툭 꺾인다.


📌 베란다에서 세상의 풍경을 바라본다. 또 간절한 마음이 된다. 한 번만 더 기회가 주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 어제 축령산 휴양림에 왔다. 그러고 보니 여기에는 해충이 없다. 그건 여기가 쉼 없이 물이 흘러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흐른다는 건 덧없이 사라진다는 것, 그러나 흐르는 것만이 살아있다. 흘러가는 '동안'의 시간들. 그것이 생의 총량이다. 그 흐름을 따라서 마음 놓고 떠내려가는 일 ㅡ 그것이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자유였던가.


📌 병원에서 이틀 밤을 보낸다. 그 사이 세 개의 검사가 지나갔고 하나의 검사가 남았다. 점점 지치는 걸까. 위기 감각은 느슨해지고 정신도 힘이 빠졌다. 이 내적인 무기력을 신학은 나태라고 부른다. 나태는 장세니스트들에게 가장 불온한 죄악이었다. 그건 신만이 아니라 자기에의 신뢰를 잃어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 꽃들이 찾아와 모여 앉아서 철없이 웃는다. 모든 것들이 불확실하다. 그러나 다가오는 것이 무엇이든 하나의 사실만은 확실하다. 모든 것은 마침내 지나간다는 것. : "이 놀라운 행복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분명한 건 그 행복의 근원은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것, 아니 지금 여기의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었다."


📌 늘 듣던 말의 새로움: "날마다 오늘이 첫날이고 마지막 날이야."






유튜버 새벽님이 오늘 세상을 떠나셨다고 한다. 열혈 구독자라고는 할 수 없지만 가끔 브이로그를 보면서 그의 다정한 마음, 따뜻한 가족을 응원하고 부러워했다. 암투병이 알려진 뒤로도 ‘아, 이분은 잘 이겨내고 있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 그냥, 당연히 병을 떨쳐내고 일어나실 줄 알았다.

당장 내일이 오지 않아도 아쉽지 않을 것 같다가도 누군가 심하게 다쳤다거나, 갑자기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금세 움츠러든다. 멍하니 핸드폰을 쳐다보다가도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흠칫하고 지금의 나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당신의 지금은 누군가가 그토록 원하던 오늘이다.’ 이런 명언이 있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일이 되면, 아니 몇 분만 지나면 권태를 느끼고 삶에 부대끼겠지만.

갑자기 닥치는 고통과 아픔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모든 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지만 결국에는 지금을 사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아침의 피아노>는 읽을 때마다 침울해진다. (이걸 바라시진 않았겠지만요.) 죽음을 앞둔 사람의 생과 사에 대한 묘사가 너무나도 담백해서 '마음이 툭 꺾인다.'

인간의 삶은, 나의 삶은 이토록 덧없는 것이다. 다시 한번 인간은 시간과 방법의 차이이지 결국 죽어가고 있음에 울컥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아침의 피아노
미학자이자 철학자이며, 철학아카데미 대표였던 김진영 선생의 첫 산문집이자 유고집 『아침의 피아노』. 역서 《애도 일기》와 공저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외에는 따로 저작이 없던 저자의 마지막 생의 의지와 책이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제자들의 마음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선물과도 같은 책이다. 문학과 미학, 철학에 대한 성취의 노트이자 암 선고 이후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을 지나간 작은 사건들에 시선을 쏟은 정직한 기록으로, 임종 3일 전 섬망이 오기 직전까지 병상에 앉아 메모장에 썼던 2017년 7월부터 2018년 8월까지 234편의 일기를 담았다. 어려운 사상가와 철학을 알기 위해 배우는 교양을 위한 공부가 아닌, 자신 안에서 나오는 사유를 위한 공부를 귀히 여기라고 늘 당부했던 저자의 마음처럼 저자 자신과 세상과 타자를 사유하며 꼼꼼히 읽어낸 문장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저자
김진영
출판
한겨레출판사
출판일
2018.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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